비단옷을 입은 빚도 있다
비단옷을 입은 빚도 있다.
평생 빚과 무관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남에게 돈을 빌려주거나 남에게서 돈을 빌려 쓴 빚, 빚을 경험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빚,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이 돈빚이다.
빚, 하면 빚을 놓는 것 보다는, 빚을 진 일, 빚쟁이라는 말이 바로 떠오른다.
그만큼 살아가면서 무섭고, 힘들고, 좋지 않은 기억을 남기는 것이 빚을 지고 사는 것이기에 우리의 머리에 깊이 각인되어 바로 튀어나오는 괴물 아닌 괴물이 되어있다고 본다.
그 외에도 남에게 돈을 빌려주고 못 받았거나, 남에게 돈을 빌려 쓰고 고통을 당하였거나 하는 일들은 평생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빚의 기억들이다.
돈빚 외에도 빚은 많다.
남에게서 고운 말을 듣고 내 생에 도움이 되었던 말빚.
어쩌다 무심코 남에게 한 마디 말을 잘못하여 두고두고 가슴에 후회로 남아있는 말빚.
같은 말빚이라도 좋은 말빚이 있고 좋지 못한 말빚이 있다.
돈빚도 나에게 도움이 되었던 좋은 빚이 있을 수도 있고, 나에게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는 빚의 기억도 있으리라.
가령 남에게 빌린 돈으로 집을 사서 집값이 많이 올랐다거나, 누가 빌려준 돈으로 사업을 하여 그 사업이 성공을 하였거나, 남의 도움으로 위기를 면했거나 하면 그런 일들은 평생 잊히지 않는 좋은 기억의 빚이 될 것이다.
돈빚, 말빚 외에도 이 세상 살아가면서 접하는 것이 수도 없이 많은 빚의 경험일 것이다.
내가 이렇게 이 세상에서 살 수 있게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에 대한 빚. 배움을 주셨던 스승에 대한 빚. 곡식과 과일, 고기로 먹은 생명에 대한 빚, 살아오면서 내가 평생 마신 공기를 만들어 준 나무들에 대한 빚, 햇볕에 진 빚, 물에 진 빚, 실용적인 빚에서부터 추상적인 빚까지 열거하자면 한이 없을 것이다.
잠시 말이 곁으로 흘러간 느낌이다.
내가 여기에 쓰고 싶은 빚에 대한 이야기를 이제 시작하여야 하겠다.
나에게 평생 잊히지 않는 빚에 대한 기억이 두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내가 20대였을 때였다. 형편이 어려워 남의 집에서 장리쌀(쌀 한가마니를 가져오면 일 년 후에 쌀 두 가마니를 갚아야 하는 고리의 빚인데, 그 때는 한 가마니를 가져오면 일 년 후에 쌀 한 가마 반을 갚아야 하는 때였지만 장리라고 말을 하였다).을 빌려 먹고 살았을 때였다.
여름에 먹을 식량이 없어서 학림아재라는 대소가 작은댁에서 보리 한 가마니를 빚으로 얻어왔다. 여름에 보리 한 가마니를 빚으로 가져오면 가을에 쌀 한 가마니를 갚아주어야 하던 때였다. 가을이 되어서 쌀을 갚으려 가지고 가겠다고 연락을 드렸더니, 가져오지 말고 다음해에 본전인 보리를 한 가마니만 다시 주라고 하셨다. 우리 집이 종손집이고 연로하신 할머니가 계셔서 그렇게 하셨겠지만, 형제간에도 나 몰라라 하면 그만인데 평생 잊혀 지지 않는다.
또 한 가지는 내 친구 중에 송일환이라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군에서 제대를 해가지고 와서 형 집에 얹혀살면서 돈이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형 집에 얹혀사는 백수에게 돈 빌려줄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나에게 쌀 두 가마니만 빌려달라고 하기에 쌀 두 가마니를 빌려주었다. 그해 가을에 이자와 함께 고맙다고 내의 한 벌을 사가지고 함께 가지고 왔었다.
그 친구는 그 뒤 임용고시에 합격하여 교편을 잡고 결혼도 잘 하여 공무원 부부가 되어서 잘 살고 있는 친구인데 몇 십 년이 지났지만 잊혀 지지 않는 기억이다.
이 두 가지 기억은 오래되었지만 지워지지 않고 아름다운 비단옷을 입은 빚으로 아직까지 나의 머리에 앉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