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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고기에 대한 작은 생각

정하선 2020. 7. 6. 15:32

개고기에 대한 작은 생각

                                 정하선



개고기 시비가 붙었다.

월드컵, 세계적인 체육행사를 앞두고 서다. 88 올림픽 때도 개고기 시비가 있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시비에 휘말려야 하는가.

이번에는 확실한 입장표명을 해야 한다. 우리의 개고기 식문화를 세계가 인정하도록 해야 한다.



방편의 하나로 프랑스 대학생들과 교수를 초청하여 개고기 요리를 시식케 하는 장면을 tv에서 보았다. 그들도 개고기 요리를 맛으로 인정하는 표정이었다.

서양인들은 왜 개고기를 먹는 것을 꺼리는가. 우선 그 내력부터 살펴보자.



그들은 육식 위주의 식생활을 한다. 소, 양, 돼지, 칠면조, 닭, 오리, 등등 여러 가지의 가축을 길러서 잡아먹는다. 땅이 넓고 사료가 풍부해서 가축을 기르기 쉽다. 기르는 가축만으로도 풍부한 식사 거리가 된다. 농사는 가축으로 짓지 않고 기계로 짓는다. 소는 농우가 아니고 식재료로 기른다. 질 좋은 육식의 식재료를 손쉽게 많이 얻을 수 있다.

그들은 개를 기를 때 방목장에서 가축을 지켜주는 동물로 기르고 있다. 방에서 애완용으로 기르고 있다. 사람을 무척이나 따르는 짐승이다. 장난감으로 기른다. 그들이 유독 개고기만 먹지 않는 것은, 유치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들의 생활습관인 것이다. 고기가 넘쳐나는데 실내 아니면 마당에서 기르는 작은 등치의 개를 잡아먹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개는 집을 지키고 가축을 지키는 역할을 하는 동물이다. 집을 지켜주고 가축을 지켜주는 개를 잡아먹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나이가 먹으면 먹을수록 영리해지기 마련이다. 나이 먹도록 오래 길렀을 것이다. 오래 기르다 보니 사람과 밀접하게 가까워지고 충견이 되어서 죽으면 묻어주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충견을 묻어주었다는 얘기는 많이 전해져 내려오지 않는가.



죽은 개고기 아니라도 고기가 흔해빠진 식생활을 하는데 정이든 짐승의 시체를, 늙어서 질긴 고기의 시체를 먹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반면 우리 조상들은 육식보다는 초식 위주의 식생활을 하는 민족이다. 소는 농사를 짓기 위해서 길렀다. 논밭을 갈고 분뇨는 거름이 되었다. 좁은 땅 부족한 사료 때문에 소를 많이 기르기는 어려웠다. 한 집에 한두 마리 기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마저도 부농이 아니면 기르기가 어려웠다. 사람 먹을거리도 부족한데 소를 먹일 수 있는 소먹이가 넉넉할 수 없었다. 양이나 닭, 오리, 돼지 등도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기르기가 어려웠다. 농사 부산물로 한집에 한두 마리 기르는 짐승들이다. 우리의 가난한 농경생활에 비추어볼 때 우리의 영양식으로 육식 부분을 채워주기는 턱없이 모자랐다. 소고기는 일 년 내내 한 번도 맛보기가 어려웠다. 몇 년 만에 어쩌다 맛보는 고기였다. 귀한 손님인 사위가 와야 닭이라도 한 마리 잡던 시절이다. 그에 비하면 거의 집집마다 기르는 것이 돼지였다. 명절이나 잔치가 있을 때 잡아서 한두 근 씩 나누어 먹는 것이 돼지다.

어렸을 때 명절이나 잔치가 있을 때 돼지 비개라도 몇 점 먹으면 바로 설사를 하여 측간에를 뛰어다니던 생각이 난다. 부보님들은 말간 속에 기름기가 들어가서 그런다고 했다. 그에 비해 개고기는 다른 고기에 비해 지방이 적고 단백질이 많은 음식이다. 개고기는 아무리 많이 먹어도 설사를 하는 일도 없다. 육식이 아닌 초식 위주의 우리에게는 이런 개고기가 몸에 영양균형으로 맞아 보신용으로 먹으면서 보신탕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개는 사람이 먹고 남은 음식찌꺼기나 사람이 먹을 수 없는 고기 뼈. 똥을 먹여서 한두 마리 길렀다. 개는 일을 하는 짐승도 아니다. 애초부터 키워서 잡아먹을 식용으로 키운 것이다.

평생 주인을 위해서 뼈 빠지게 일을 해주는 소를 쉽게 잡아먹을 수는 없었다. 일을 해 줄 수 있는 소를 잡아먹으면 농사를 짓지 못한다. 소 한 마리가 살림의 반이라고 했는데 이런 소를 잡아먹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서양에서 소를 식용으로 길러서 잡아먹었듯이 우리는 개를 식용으로 길러서 잡아먹었다. 에스키모가 썰매를 끌던 개를 잡아서 육식으로 먹는 것을 tv에서 보았다. 에스키모가 돼지나 소를 길러서 잡아먹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짐승을 기르는 조건이 서양과 우리나라는 애초부터 다른 것이다.



아이를 낳을 때가 가까워지면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제사 때가 되어도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절에 갈 때도 개고기는 먹지 않는다. 개는 똥을 먹고살기에 그런 것인가. 아니면 참과 거짓을 개로 구분하는 개념을 가졌기에 그런 것인가는 잘 모르겠다. 참꽃과 개꽃, 망초와 개망초, 나리와 개나리 등등 수도 없이 많다. 이런 것으로 볼 때 개고기는 우리에게 좋은 음식으로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다. 참이 아닌 개를 잡아 부족한 단백질 보충용일 뿐이다.



나는 태어날 때 목에 탯줄을 감고 태어났단다. 칠성님이 점지해준 출생이라고 집에서 개고기를 먹지 말라고 해서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아버지 어머니도 내가 해로울 가 봐서 개고기는 먹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스물대여섯 되었을 때였다. 일행과 함께 보신탕집에 가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개고기를 못 먹는다고 했더니 그중 한 분이 어른 모르게 먹으면 괜찮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먹은 것이 어쩌다 빠질 수 없는 자리에서는 몇 번 먹었다. 하지만 마음속에 께름칙함이 있어서 그런지 별로 맛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음식은 맛이 있어야 좋은 것인데 맛없이 먹을 필요는 없었다. 나는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다른 고기도 많은데 꼭 개고기를 먹을 필요가 없다.



아내는 개고기를 잘 먹는다. 맛이 있단다. 아내가 늑막염이 걸려서 한 마리 분의 개고기를 먹은 일이 있다. 의사가 늑막염에는 개고기가 제일 좋은 약이라고 해서 한 마리 해 먹였더니 좋아졌다. 옛날에는 폐병에도 잘 먹으면 낫는다고 하여 뱀이나 개고기를 먹고 나은 사람들이 주위에 흔했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개를 애완견으로 방에서 기르는 집이 많다. 그들은 개를 잡아먹지 않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김치나 된장을 싫어하는 대신 햄버거나 피자를 좋아하는 것처럼 방에서 애완견을 기르다 보면 개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 지금은 개고기가 아니라도 고기가 흔해빠진 세상이다. 우리의 식생활도 거의 서구화되어서 육류를 너무 많이 섭취해서 탈이라고 말들을 한다. 이제 개고기를 먹을 이유가 점점 없어져가고 있다.



옛날 식인종이 지금도 식인종인가. 식인종보다는 화학무기를 개발해서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쾌락을 맛보는 종족들이 오히려 식인종만 못한 것이 아닌가. 꼭 개만 생명인 것은 아니다. 모든 동물이 다 생명인 것이다. 인간의 우월성을 내 새워 다른 종의 생명은 생명으로 알지 않는 것도 미개인이기는 매 한 가지가 아닌가.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먹지 않고 신성시하는 나라도 있다. 그 사람들 입장에서 본다면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개고기를 먹는 것도 이와 다를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이제 세계는 하나라고 말들을 한다. 골목에 들어서면 어떤 집에서는 된장냄새, 어떤 집에서는 갈비 조리는 냄새, 생선 굽는 냄새, 밥 짓는 냄새, 빵 굽는 냄새, 등등이 섞이는 것이 21세기다. 개고기도 그중의 하나일 뿐이다.

자기가 먹지 않는다고 그걸 먹는 다른 이웃을 보기 싫은 눈초리로 혐오하는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보는 사람들이 오히려 미개인일 것이다.

서로가 상대방의 모든 문화와 함께 음식문화도 이해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현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어야 하기에 더더욱 그렇다.



정하선 에세이집 (견디며 사는 나무)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