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하선 2020. 9. 1. 11:07

 

 

보름달



                       정하선



 

 

아침 6시에 일어났다.

아침 6시경에 일어나는 것은 한 일 년 정도 되었다.

옛날에는 7시경에 일어났는데 한 시간을 앞당긴 것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저녁에 11시에 잠들던 것을 10시로 당긴 이유밖에는.

 



10시로 잠자는 시간을 당긴 이유는 정말 사소한 일에서 비롯되었다.

가게에서 9시에 퇴근, 집에 오면 9시 반 정도 된다.

씻고 나면 10시경이다. 컴퓨터 켜고 메일 확인하고 나면 10시 반, 10시 반에 컴퓨터 끄고 아내와 화투를 30분 친다. 11시에 잠자리에 들면 바로 잔다.

아내는 가게에서 6시나 7시경에 온다. 그때부터 혼자 앉아 tv를 보거나 혼자 화투놀이를 한다.

심심하기 이루 말할 데 없을 것이다.

해서 화투놀이를 30분 해준다. 그렇다고 내가 화투를 잘 치는 것도 아니다. 아내 역시 마찬가지다. 아내나 나나 어디 가서 10원짜리 내기 화투도 못 치는 실력이다.

껍데기가 5개면 1점인 줄 알고 화투 점수 계산을 하였는데 다른 사람 치는 것을 보니 껍데기 10개가 1점이었을 정도다.

시간 보내기로 짝만 맞추어주는 화투놀이였지만 30분 화투놀이를 해주면 아내의 얼굴이 확 밝아진다.

그렇게 족히 이삼 년을 보냈을 것이다.

아내의 욕심이 차츰 많아졌다.

화투 치는 시간을 늘리려 하고 컴퓨터에 앉아있는 30분을 줄이기를 바라더니 컴퓨터 아니면 못 사냐고 결국 투정을 부리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화를 내고 컴퓨터를 꺼버리고 화투놀이도 해주지 않고 10시에 누워버린 것이 길이 되어 일 년 정도나 되었다.

그때부터 컴퓨터도 안 하고 화투놀이도 안 하고 퇴근하면 몸 씻고 tv을 보다 10시에 잠자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아내는 아침 6시경에 일어나 운동을 나간다. 무릎 관절염 때문이다. 아내가 나가면 나는 일어나서 컴퓨터 켜고 메일을 확인한다. 원고 정리할 것이 있으면 원고 정리를 한다.

아내는 7시경에 들어온다.

옛날에는 아침 운동도 아내와 함께 다녔었는데·····

함께하는 운동도 취미생활도 놀이도 부부간에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것인가? 문화센터에 댄스를 하러 오는 부부들은 다른 사람보다 유난히 더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집에서 함께 하는 사소한 화투놀이도 그런가 보다.

하물며 세상사 다른 일이야 어쩌랴. 계속하다보면 욕심이 생기고, 욕심이 늘어 만월이 되면 결국 다시 이지러지는 일이 생길 것이다.



 

메일을 확인하려고 컴퓨터를 열기 위해 전원 스위치를 꽂고 기다리는 동안 바로 곁에 있는 창을 열었다.

창은 서쪽 창이다.

창을 열자 시원한 가을바람이 쏴하니 들어왔다. 아침 바람이 상쾌하다.

하늘 역시 티 한 점 없는 옥빛이다.

전형적인 가을 하늘이다.

하늘에 약간 이지러진 달이 희미한 모습이지만 뚜렷이 떠있다.

추석 지난 지가 며칠 되었으니 오늘이 아마 음력 스무 날쯤 되었을 것이다.

추석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달이 상당히 많이 이지러져 있다.

며칠 전 추석 달이 슈퍼문이라고 매스컴에서 떠들고 아주 큰 보름달이 당당하게 하늘에 떠 있었는데. 제아무리 큰 보름달이라 해도 가득 차면 이지러지기 마련인 것이 세상 이치가 아니던가.



하늘에 별들은 자취를 감추고 하나도 없고 달만 있다.

창에는 별이 몇 개 떠있다.

하늘에 별이 아니고 창문에 붙여놓은 별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방은 3층인데 옛날 유치원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7층짜리 커다란 건물인데 1층은 교회였고 3층이 유치원이었던 건물이다.

교회가 망하여 경매로 넘어간 건물을 집주인이 낙찰받아 세놓은 집에 내가 세 들어와 살고 있다.

내가 전세로 들어와 산 지 벌써 9년째다. 곧 나가야 하겠지만····



 

창에는 별들이 몇 개씩 있다. 북쪽 창에도 서쪽 창에도 별들이 밤이고 낮이고 몇 개 떠있다. 거실로 들어오는 현관문에는 귀여운 아기도깨비가 한 마리 있다. 노란색 아기도깨비는 한 손에 포크와 한 손에 나이프를 들고 있다. 알을 깨고 이제 나오는 모습이다.

그림들이 귀엽고 좋아서 떼어내지 않고 붙은 채로 9년을 살았다.

지금도 막 그려놓은 듯 색이 생생하다.

어떤 동심 가득한 유치원 선생님이 한나절 아니 하루나 이틀 사흘 그림 그리고 색칠하고 오려서 붙였을 것이다. 보지 못했어도 청순한 아름다움을 가진 얼굴이 마치 눈앞에 있는 듯 선하다.

유치원 선생의 얼굴 같은 보름달이 선생이 만들어 붙여놓은 유리창의 별들과 어울려 한참 무슨 재미있는 얘기라고 나누고 있는 듯 아니면 동요라도 부르고 있는 듯, 어디선가 맑은 귀뚜라미 노래가 들려온다.



집주인은 십이삼 년 전 이 집을 경매로 사서 들어왔다.

집 가진 유세를 눈에 보이게 안 보이게 부리더니 결국 작년 겨울 어느 추운 날 야반도주를 하고 말았다.

이 집은 다시 경매로 다른 사람(교회건물)으로 넘어갔다

이달까지 나가라는 통지가 두 번 왔으나 나갈 수가 없다.

전세금을 다 받은 몇 집은 이미 다 나갔다.

전세금을 떼인 세 집은 돈이 없어 집을 얻어나갈 수가 없다.

아니 그보다는 경매받은 교회에서 이사비용이라도 어느 정도 보충을 해서 받아 나가야 한다. 이 방식밖에는 길이 없다. 이런 방식이 통례라는 것도 경매를 당한 뒤에야 알아본 방법들이다.

교회단체라 어느 정도 손실을 보충해줄지 아니면 법으로 강제 이거를 시킬지는 미지수다. 절박한 사람이 갈 곳은 끝까지 버텨보는 수밖에 없다.

내가 이렇게 당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일이다. 온갖 후회가 몰려왔으나 결과는 전세금 손실 밖에는 없다.

어쩔 때는 이것도 내 팔자려니 하다가도 분통이 터진다.

전세금 떼먹고 도망간 집주인이나 나나 저 달과 엇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그 크기가 다를 뿐이다.

세상은 차오름이 있으면 이지러짐이 있고 이지러짐이 있으면 차오름이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 것을.

다만 우리는 그 시기를 모르고 살아갈 뿐이라는 것을.

저 달이 엊그제 수퍼문이라 하였더라도 이지러지면 날카로운 원망만 남은, 칼날같이 날카로운 차디찬 초승달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믐이 되면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다시 다음 달이 되면 차츰차츰 차올라 보름달이 될 것이다.

마냥 넉넉하고 환하고 세상을 다 보듬어 안아줄 것 같은 보름달이 될 것이다.

보름달일 때는 항상 보름달일 줄 알고 더 채워지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채워져 만월이 되면 다음에는 이지러짐이 되는 것을 달이, 달·달마다 하늘에 떠서 세상 사람들에게 골고루 가르쳐 주어도 그 이치를 깨우치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 사람이 아닌가.

이 글을 쓰다 보니 달은 하늘 속으로 숨어버리고 자취가 없다.




정하선 에세이집 (운과 귀인은 누구에게나 온다)이화문화출판사-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