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하선 2021. 11. 14. 20:06

 

    지게

 

 

                  정하선

 

 

 

 

발대에게

 

 

, 지게야.

자네도 여그 어디서 산다고 들었네.

나도 얼마 전에 서울로 이사 왔어.

글고, 아따 그 머싱가, 여그가 박물관이라고 헌디, 여그다 자리를 잡았네.

자네가 한번 보고 싶네. 가깝게 상께 서로 만나서 옛날 얘기나 하문서 살믄 안 좋겄능가.

내가 세상에서 젤로 잘 아는 동무가 자네인가 싶네만.

자네도 날 전부 다는 모를 걸세.

내가 자네를 만난 것은 아마도 사람의 나이로 치자면 한 오십 되었을 때가 아닝가 싶네.

내가 태어나자말자 바로 만난 것이 자네처럼 생긴 댓가지 발대였다네. 그 발대가 명을 다해 저세상으로 가자 내 주인이 새재장에 가서 비사리 발대를 사다가 나의 등에다 얹어주었지. 비사리 발대는 뒷집 아짐처럼 생기기는 잘 생겼는디 너무나 커서 내가 항상 버거워했었어. 그래도 정이 들어 나는 그 비사리 발대를 업어주는 날이 많았는디, 비사리 발대가 명을 다하자 주인은 비사리 발대보다는 그래도 댓가지 발대가 좋다고 대밭에서 댓가지를 굵고 곧고 잘생긴 걸로 따다 추려 엮어 댓가지 발대를 맹글어 주었네. 아마도 그 뒤로도 두서 번 자네처럼 생긴 댓가지 발대를 맹글어 내 등에 얹어주어 내가 업고 다녔을 걸.

글고, 그 다음에 주인이 자네를 맹글어 내 등에 얹어주었을 것일세.

그때 자네는 아주 이쁜 새색시였어. 초록 치마를 입고 나에게 왔을 때 내 가슴이 벌렁벌렁 했당께.

사람으로 치자면 나는 홀아비이고 자네는 신부라고 하면 맞을랑가.

때로는 자네를 집에 두고 나 혼자 일을 나가면 자네가 어찌나 보고 싶었던지 몰라. 그래서 자네와 함께 일을 많이 다녔지.

자네도 아마 잘 알고 있을 걸세, 내가 자네를 만났을 때부터 얼마나 자네를 이뻐했능가를. 물론 앞에 만난 발대들도 다 이뻐하고 함께 일을 다니기는 했지만 자네처럼 이쁘지는 않았어.

아따, 그 머싱가, 세상사 만남이란 다 그렁가 보네. 처음 만나서 정이 들면 애틋한 사랑으로 함께 붙어살지만 한쪽이 죽어 헤어지고 나믄 그땐 못 잊을 것 같고 못 살 것 같아도 점점 잊어지고 다시 만나는 상대와 또 정이 들어 서로 살을 맞대고 업어주고.

이런 말 한다고 서운해 하지는 말게나. 자네도 나를 얼매나 믿고 따르고 함께 했는지는 세상이 다 아는 일이 아니 등가 잉. 세상이 우릴 갈라놓기 전에는 우리는 한시도 서로 떨어져 산다는 것은 생각도 못해본 일이 아니 등가 말일세.

아따, 그렁께, 그건 자네가 나보다 더 잘 알 것이라 생각하네.

 

 

자네가 나의 출생비밀을 알고 싶어서 물어볼 때가 가끔 있었지. 뭐 비밀일 껏 까지야 없겄네 만은.

그땐 내가 왠지 산골짝에서 태어나 자란 놈이란 걸 말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묵묵부답으로 있었을 뿐이었네.

이제는 다 늙어서 부끄러울 것도 없고 항께 내가 태어난 것을 다 말해도 될 것 같네.

나를 항상 애지중지 아껴주고 등에 업고 다니던 주인은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났다네. 주인이 나 같이 생긴 지게를 처음 진 것은 초등학교 4학년이었을 때였다네. 논에서 벼를 훑어 가마니에 담아놓고 하네(할아버지)가 지고댕기든 지게에 얹어놓고 질 수 있냐고 물었을 때 주인은 고개를 까닥까닥하고 처음으로 지게를 졌다네. 가깝기는 해도 집까지 왔었다네. 할무니와 하네가 불안해서 옆에 따라오며 부축을 해주기는 했지만. 그때 할무니와 하네가 하신 말씀이 아이고 이제 내 새끼가 다 컸네.’ 하시면서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모른다네. 그도 그럴 것이 내 주인은 아주 어려서 3살 때 여순반란사건 때 양민학살현장에서 아부지를 잃었다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엄니마저 다른 남자에게 개가를 해 가뿌러서 아주 늙은 할무니와 하네가 키웠는디 얼마나 좋았겄능가. 할무니, 하네, 눈에는 고맙고 대견하고 했겄지.

 

 

그 뒤부터 주인은 나를 지기 시작해서 풀을 베어 오고 나무를 해오고 나락을 저 날리곤 하는 일꾼이 되어 나와 함께 살아왔네.

주인은 열일곱 살 때 이웃마을에 사는 처자와 결혼을 하고 살림을 시작하면서 나보다 앞에 있었던 하네가 물려준 지게가 수명을 다하자 나를 만들려고 산에 가서 지게 가지로 적당한 나무를 골라 베어다 나를 맹글었다네.

지게로 맹글기에 좋게 생긴 가지가 붙은 소나무를 베어다 금 가지 말라고 그늘에 말려두었다 나를 맹글었다네.

시장에 가면 목수들이 맹글어서 아주 잘생긴 지게를 살 수 있었지만 값이 비싸서 살 엄두를 못 냈다네. 주인은 어려운 형편이라 나를 맹글어 지기로 하고 나를 맹근 것이라네. 주인은 산이 없어서 남의 산에서 나를 맹글기에 적당한 나무를 훔쳐다 맹글었는디, 그때는 다들 그렇게 사는 세상이어서 보통으로 알았다네. 설령 산 임자가 알았다 해도 꾸중 좀 들으면 되었고 아는 사람 같으면 필요하면 가져다 쓰라고 흔쾌히 주곤 했었다네.

지게 감으로 좋게 가지를 뻗은 소나무를 찾기는 참 어려웠다고 했네. 지게 감으로 좋은 나무를 보면 그 걸 베어다 놓고, 베어다 놓은 지게에 어울릴 짝꿍이 될 나무를 찾아서 베어다 놓았다가 잘 마르면 그때 다듬어 지게를 비로소 맹글었다고 하네. 때로는 시궁창에 넣어두어서 한 일 년 정도 된 다음에 꺼내서 다듬어 맹글기도 했는디. 나무는 그렇게 해야 벌어지지 않고 뒤틀리지 않아서 오래 사용을 할 수가 있거든.

소나무 지게 감이 찾기가 어려워 오리목 등 잡목으로 맹글기도 했는디 잡목으로 맹글면 지게가 무겁고 명이 짧아서 귀하긴 해도 소나무를 될 수 있는 한 구해서 맹글었다고 했네. 소나무 중에서도 아주 큰 소나무의 가지에서 잘 생긴 것을 따내면 그게 일품이었지만 그런 나무가 어디 그리 흔했겄능가. 마치 사람으로 치자면 가품 좋은 집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 사위나 며느리 감으로 좋기는 하지만 어디 그렇게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을 구하기가 쉽던가. 적당하면 구하여 잘 만들면 되는 것이지.

 

 

지게를 맹글 때는 낫이나 짜구로 나무를 잘 따듬고 쌔장을 박을 구멍을 끌로 뚫어야 하였네. 쌔장은 참나무나 밤나무 아카시아 같이 단단한 나무을 제일로 쳤는디. 쌔장은 4개를 박는데 5개를 박기도 했네. 젤로 위에 것은 한 이십 센티 정도로 좁게 하고 가장 밑에 것은 삼사십 센티 정도로 넓게 해서 왼쪽과 오른쪽 지게 감의 구멍 뚫어놓은 곳에다 박고 철사나 칡넝쿨로 양쪽 지게 감의 허리를 묶어 퉹게로 찔러 돌려서 단단히 틀어 두 번째 쌔장과 세 번째 쌔장에다 걸쳐 놓으면 못 하나 박지 않아도 단단하기가 말할 수 없었네.

거기에 볏짚으로 등태를 엮어 쌔장 밑 부분에 넣어 접어 올리고, 윗부분은 새끼를 꽈서 윗쌔장에다 묶어주면 되었지. 어깨에 짊어질 멜빵 두 개를 땋아서 양쪽에 하나씩 달아주면 완성이 되었네. 등태와 멜빵이 떨어지면 그것만 새로 맹글어 갈아주먼 거의 평생을 쓸 수 있었지.

 

 

거기에 자네 같은 발대가 필요할 때가 있었네. 거친 짐을 질 때는 나 같은 지게만 있으면 됐지만 쇠풀이나 밭작물을 져올 때, 흙이나 돌 같은 것을 날라야 할 때는 자네 같은 발대가 없으면 안 되었네.

볏단이나 나뭇단을 옮길 때는 양고작이라고 하는 가지가 두 개가 뻗은 나무를 지게 고작에다 찔러서 키를 키운 다음에 져야 앞으로 넘어오지 않고 질 수가 있었지.

또 나와 함께 꼭 같이 다는 것이 지게 작대기라는 것이 있었지. 위쪽에 조그만 가지가 있는 쪽 곧은 나무를 가볍고 단단한 것으로 골라서 썼는디 지게에 짐을 지고 일어날 때나 내리막길을 갈 때 지팡이처럼 짚고 다니면 힘을 받을 수 있어서 좋았네. 마치 사람의 지팡이 같다고 하면 맞을 것이네. 헌데 지게 작대기는 지게를 받쳐놓고 쉴 때 제일 많이 사용 했네. 땅에다 끝을 미끄러지지 않게 쬐끔 찔러 세우고 위쪽은 지게 고작에다 걸쳐서 세워 두면 됐거든.

지게나 발대나 양고작이나 지게 작대기는 다 한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딱 맞을 걸세. 서로 도와주면서 힘을 합해서 살아가는.

 

 

내가 주인을 만나서 즐거웠던 때도 많았었네. 겨울에는 저수지 얼음에다 나를 바르게 뉘어서 쭉 밀어놓고 썰매 맹크롬 얼음배를 타기도 하고. 어쩌다 일없이 쉴 때는 나를 뉘어 놓고 내 위에 등을 대고 주인은 편하게 누워서 잠을 자거나 쉬기도 했는디 내가 주인을 즐겁게 해주고 편하게 해 주었던 것이 지금 생각해봐도 보람된 일을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뿌듯하지 뭔가.

 

 

어떤 사람은 지게에 애기들을 태워 짊어지고 오는 사람도 있었지. 놀이기구가 별로 없던 시절이었으니 애기들이 얼마나 좋아했것능가.

헌디, 우리 주인은 지게에 애기들을 태워가지고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네.

지게에 산사람 짊어지는 것 아니라고 할아버지에게서 배워서 그랬다고 했네.

6·25 전쟁 때는 우리 동료인 지게가 큰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고 한 말을 많이 들었네. 산이 험하고 높은 고지에 탄약을 비롯한 군수품을 보급할 때 지게가 제일 좋은 운반수단 이였다네. 우리 지게가 없었으면 승리를 하기가 어려웠을 거라고 했네.

내 주인은 리어카라고 하는 것을 하루 빌려 쓰고 3일간 나와 함께 볏단을 날라주는 등짐을 해주기도 했네. 리어카라고 하는 신식 운반도구가 나오면서 내가 푸대접 받기 시작한 때가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일세.

 

 

새마을 운동 노래가 퍼지고 들판에 넓은 길이 생기기 전까지는 볏단을 저들이거나. 산에서 나무를 해오거나. 밭에서 밭곡식을 수확을 할 때 내가 아니면 안 되었는디 길이 넓어지면서부터 주인은 나를 멀리 하기 시작했네.

주인이 나를 멀리 한 것이 아니고 세상의 변함이 나와 주인의 사이를 갈라놓은 것이라 나는 생각을 하네.

이제 나는 역사의 증인으로나 남아서 박물관이라는 곳에 나의 혼백을 묻어야 할 것 같네.

아따,머싱가, 그러고 봉께 나를 그렇게도 사랑해 주었던 주인의 안부가 궁금하기도 하네만 주인은 어디서 지금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리라 생각을 하네. 우리 주인 같이 부지런하고 검소한 사람이 없었으니까. 아마 복 받아서 잘 살고 있을 거야. 그래도 한 번 보고 싶은디.

우리 서로 만날 때까지 몸 보존 잘하고 있기로 하세. 자 그럼 오늘은 이만 안녕.

 

 

 

 

       정하선에세이집 (운과 귀인은 누구에게나 온다. 이화문화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