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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추억

정하선 2014. 6. 16. 06:22

 설 추억

 

 

 

 

며칠 있으면 설이다. 명절 중에 제일 큰 명절,

제일 반가운 명절이 설이었다, 예전에는.

 

 설이 되면 어른아이 구별 없이 새 옷을 지어입거나 사 입었다.

신도 새로 사 신었다. 고무신이나 운동화를 새로 사주면 그 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새 신을 사고 새 옷을 입는 것만큼 좋은 일이 없었다. 내년까지 입으라고 몸에 맞지 않게 큰 옷을 사주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설이 되기 한 달이나 보름 전부터 조청을 고아서 작은 단지에 담아두는 일 부터 생선을 사다가 말리고 하는 설준비가 시작된다. 

콩나물이나 숙주나물을 기르는 시루를 방에 들여놓고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었다. 물만 먹고도 콩나물이나 숙주나물은 소복하게 올라오고 신기하게도 잘도 자랐다.

콩을 맷돌에 갈고 바닷물을 길어다 두부를 만들었다.

 

설 이삼일 전부터는 묵을 쑤어 물에 담가두고 가래떡을 뽑아 썰어서 떡국을 끓일 떡국떡을 만들었다. 

남자어른들은  한 쪽에서 돼지를 잡았다, 아이들은 돼지 오줌보에 바람을 넣어 만든 공으로 공차기를 하면서 히히덕 거렸다. 돼지를 잡아서 몇 근씩 나누어 사다가 전·적 감을 만들고 국을 끓여먹었다. 그 국이 어찌나 맛이 있었던지, 나는 그 국이 지금도 제일 맛있는 음식이다. 돼지고기에 배추김치를 썰어넣은 김치 찌개인데 국물을 많이 넣고 끓여서 찌개보다는 싱거운 맛이 나는 국이다. 지금도 자주 끓여먹는다.

 

하얀 앞치마를 입고 전을 부치고, 떡가루를 빻아 떡을 찌고 떡을 치는 소리가 이 집 저 집에서 들려왔다. 참기름 냄새, 전 부치는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했다. 지금까지 머리에 남아있는 바로 명절 냄새였다.

평소에 입기 어려운 새 옷에다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고 세배를 하면 세뱃돈을 조금이라도 받을 수 있었으니 아이들 입장에서는 좋을 수밖에 없었다. 어른들이야 없는 살림에 힘들었겠지만.

 

 그믐날 저녁에는 물을 데워서 겨우내 낀 때를 씻어내고 밀어내었다. 손등이나 발등, 무릎 팔꿈치 등에 낀 때는 잘 벗겨지지 않으면 쌀겨를 문질러 벗겨내기도 했다. 그믐날 목욕을 하는 일은 어른아이 가리지 않고 모두 하였다. 단순히 때를 벗겨내는 일이 아니고 묵은 해를 깨끗히 씻어내는 마음으로 하는 목욕이었을 것이다. 목욕을 할 때 팔꿈치나 오금쟁이 때를 벗겨줄 때 그 아픔이란 말로 할 수 없었다. 손등이나 발등에 때는 쇠죽솥에 쇠죽물로 때를 벗기면 따뜻해서 좋고 잘 벗겨졌다. 등겨와 여물이 섞인 물이라 더 잘 벗겨졌을 것이다.

 

그믐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샌다고 겁을 주며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잠을 자지 말라고 하였다. 혹시나 그럴가 겁이 나서 잠을 참다가 참다가 결국은 잠이 들고 말지만.

우리 집 설에는, 대가 끊기어 친정이 없어진 먼 친척 할머니 한 분이 친정 대신 오셨다고 해마다 오셔서 설을 쇠고 가셨는데 할머니와 그 할머니가 밤을 새워 하시는 얘기들이 잠결에 날을 새워 들려왔다.

 

설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새 옷을 입고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에게 세배를 하였다. 세배를 할 때 부모님께 세배할 때 아들이나 딸은 방에 들어가지 않고 물래(마루) 에서 절을 하였다. 손주 손녀들은 방안으로 들어가서 세배를 하였다. 그리고 어른들은 덕담을 하고 손주 손녀들에게는 세뱃돈을 주었다. 세배가 끝나면 차례상을 차리고 차례를 지냈다.

작은 집 사람들은 등불을 잡고 큰 집으로 모여서 세배를 하고 함께 차례를 지내었다.

차례가 끝나면 떡국으로 아침을 먹고 산소에 성묘를 가는데, 성묘를 갈 때는 대소가 분들이 거의 모여서 새해 복많이 받으시라는 덕담의 인사를  서로 나누고 함께 성묘를 갔다.

 

 설날 아침결에 보면 성묘하려 가는 사람들이 산 여기저기에 많이 보였다.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가기에 더욱더 눈에 띄는 풍경이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흰 두루미 떼들이 산을 날아가는 모습으로 보였다. 남부지방에서는 설에 성묘를 갔다. 추석에는 성묘를 가지 않았다. 추석 안에 벌초를 하고 성묘는 가지 않았다. 중북부지방에서는 설에 성묘를 가지 않고  추석에 성묘를 가는 풍습에 비하면 조금 차이가 난다. 생각해보면 기온 관계와 가을 걷이 관계 때문인 듯 하다.

 

성묘가 끝나면 가까운 대소가 어른께 세배를 하고 상갓집 영위에 들려 고인께 절을 하고 상주에게 세배를 하는 걸로 초하루를 보냈다. 상복을 입으면 그 상주는 돌아가신 고인과 같은 대우를 하여드리는  것이 예법이라고 들었다. 상복이 바로 고인인 셈이다. 상가집은 타성이라 하여도 꼭 정월 초하룻날 들려서 세배를 하여야 하였다.

가는 집 마다 음식을 내오므로 하루 종일 떡국을 몇 그릇씩 먹은 지 몰랐다.

세배가 다 끝나면 모여서 저녁 늦도록 화투놀이나 윷놀이를 하면서 시끌벅적하게 하루를 보냈다.

초이튿날 초사흘 날은 먼 친척집이나 성이 다른 집에 세배를 다녔다. 세배를 다니다 많은 사람이 어울리면 역시 화투놀이나 윷놀이로 시끌벅적하였다.

초닷새 경이 되면 이웃마을 어른들에게까지 세배는 거의 끝이 난다.

 

낮에는 연날리기를 하거나 팽이치기 놀이를 하면서 놀았다. 도시에서는 제기차기를 설에 하였다고 한다.( 내가 살던 농촌에서는 제기차기는 여름에 하는 놀이였다. 여름에 질경이플을 제기풀이라고 하는데 이 풀잎을 뜯어모아서 잎맥을 제거하고 잎맥속 끈을 묶어서 만든 제기를 여름 내내 차고 놀았다. 종이제기는 없었다. 내가 인천으로 이사와서 도시에 살면서 사십이 넘은 후에 종이제기는 볼 수 있었다). 오후가 되면 집집마다 다니면서 잡귀를 쫓아내고 복이 오기를 비는 매구를 치기 시작한다. 고깔모자에 오색 띠를 두르고 꽹과리, 징, 장구, 북을 치는 모습도 흥겹고 좋았지만 벅구를 들고 개인 장기자랑을 하는 것은 한없이 보고 있어도 다시 보고 싶은 놀이였다. 거기에다 마당에는 덕석을 펴놓고 음식상을 차려놓아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놀이를 하기에 더 흥겨웠으리라. 정월 보름이 넘으면 모주떨이라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매구를 치면 집에 남은 술과 음식을 내 놓았다. 그렇게 해서 설은 끝이 나 가고 보리 밟기와 보리에 추비를 하는 일이 시작되면서 설은 끝을 내어 갔다.

 

 여인들은 마당이 넓은 집에 모여서 강강술래를 하면서 정월보름까지 밤낮을 즐기며 놀았다.

처녀들과 새댁들이 농지기 고운 옷을 꺼내 입고 서로 손을 잡고 이삼십 명씩 모여서 마당을 뛰어 돌면서 주거니 받거니 선소리를 하고 후렴으로 강강술래를 하면서 도는 모습이 지금도 머리에 삼삼하다.

설에 하는 여인들의 놀이 중에 널뛰기도 빼놀 수 없는 놀이다. 짚토매를 하나 나 둘 놓고 그 위에다 두껍고 긴 널빤지를 놓으면 마치 씨이소처럼 된다. 고운 옷을 입은 아가씨나 새댁들이 널빤지 양끝에 한 명씩 올라가서 한 명이 힘껏 뛰었다 내려오면 다른 한 명은 위로 올라가고 다시 다른  한 명이 내려오면 다른 한 명이 반동으로 위로 올라가는 놀이다. 옛날에 집안에서만 살던 여인들이 밖을 보려고 한 놀이였다고 한다. 이 널뛰기는 중심을 잘 잡고 뛰어야 하는 놀이다.  힘이 많이 드는 놀이다. 그래서 여름에는 하지 않고 겨울에 하는 놓이다. 고운 옷자락과 댕기를 날리면서 뛰어오르고 내려오고 또 뛰어오르고 하는 모습은 정말 멋있는 놀이 중의 놀이였다.

 

 설에 잊을 수 없는 것이 복조리다. 정월 초하룻 날 부터 복조리 장사가 복조리 사려 하고 큰 소리로 외치면서 다닌다. 집집마다 거의 복조리를 두 개씩 사서 문위에다 걸어놓았다. 걸어놓으면 복이 들어온다고 하는 조리가 복조리다. 그 복조리는 일년 내내 쓸 수 있는 조리다. 쌀을 이는 조리가 떨어지거나 망가지면 설에 사놓은 복조리를 사용한다. 밥을 하다 조리가 망가가지면 당장 아쉬운데 5일장까지 기다릴 일 없이 바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이 복조리를 걸어놓은 지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는 설 풍속도이지만 아직 머릿속에서는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설 풍속도다.

그리고 설을 기점으로 한 달을 보내는 옛날을 재현하는 시골마을이 생긴다면 아마 좋은 관광 상품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도 함께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