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
정하선
뿔이 없어 다행이로다. 머리에 이고 있는
향기롭고 잘생긴 뿔이 없어 다행이로다
내 머리에도 너처럼 뿔이 있었다면
그 뿔로 인해 철망에 갇히었으리
그 뿔로 인해 머리에 피를 쏟았으리
꽃무늬 옷을 입었으면 무엇 하리
불어온 바람이 속옷을 들추어내는 걸
마취총 한 방에 쓰러져
뿔이 잘리면서도 피를 흘리면서도
한번 재대로 울어보지도 못하고
먼 하늘 아래 있었던 것 같은 아슴푸레한
기억을 마른 콩깍지에 섞어 씹다가
철망 안을 빙빙 돌다가 그저 하루 종일
정하선시집 - 무지개창살이 있는 (예지북스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