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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강 . 거미 . 묘비명. -정하선 시집 <재회>에서

정하선 2020. 3. 4. 21:20

   가을 강

                  외 2편

 

 

                정하선

 

가을 강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늘이 저리 깊이도 들어와

강인지 하늘인지 알 수 없구나

잔물결 아래 흰 구름 흐르고

솔개 한 마리 맴을 도는데

어느 단풍계곡 구경들 가는지

피라미 떼 흰 구름 탄다

날더러 같이 가자 눈짓을 한다

 

     거미

 

이력서를 쓴다

 

본적과

현주소를

하늘과 땅에 걸쳐놓고

 

줄줄이 빈 길을

걸어온 길을

펜으로 그린다

그려도 그려도

칸칸이 빈 칸을

 

다리가 휘청거린다

헛기침 하나에

 

이슬방울 하나에

매달려야한다

거꾸로 서라면 거꾸로 서고

옆으로 서라면 옆으로 서고

 

지금은 숨을 죽인 채

날쌘 찬스를 기다리자

이슬방울 하나일지라도

보름달

 

    묘비명

 

내 이름 이미 돌로 굳어

천년인들 못 기다리오리

만년인들 못 기다리오리

 

좋은 세상 오래오래 살으시다

그대 살기 싫도록 살으시다

살기 싫다고 생각될 때 그때쯤에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보고 살으시다

그때에 오셔도 삭아가는 내 손톱 끝만큼도

왜 이리 늦게 오셨냐 서운한 말 않으오리

 

때로는 세상살이 힘들어

내 무덤 찾아오시는 날

어깨라도 다독거려주지 못하고

아무 말 없이 돌려보냄은

내 그대 이미 잊어서가 아니고

일어나 눈물 한 방울 닦아줄 수 없어서

없어서일 뿐이오니

 

개똥밭에 살아도 이승이 좋단 말

차가운 돌이 되어보지 않고는 모르리

가슴가득 눈물 흘리며 살아도

그렇게라도 살 수만 있다면

그것이 목화송이 같은 행복이 아니겠소

그대 살기 싫도록 오래오래 살으시다

그때 오셔도

왜 이리 늦게 오셨느냐 서운한 말 않으오리다

          

                     정하선 시집 <재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