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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추값이 금값

정하선 2020. 3. 8. 22:01

   상추 값이 금값

                         정하선

 

 

젓가락으로 집어먹는 것보다 손으로 집어먹어도 흉허물 없음이 좋다,

두서너 이파리 들고 흔들어 물을 탈탈 털고, 밥 한 숟가락 떠 얹고 된장 떠 넣고 풋고추 툭 분질러 얹어, 쌈을 싸서 볼이 미어져라 먹어도 보기 싫지 않아서 좋다.

기름진 돼지고기와도 잘 어울리고 비린내 나는 생선회와도 잘 어울린다. 꼭 고기가 아니라도 된장 쌈을 해도 좋다. 고추장 쌈을 해도 좋다. 누구와 어울려도 싫어하는 내색은 찾아볼 수 없다. 속으로도 한 점 어떤 씁쓸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접시에 얹어져도 바구니에 담기어도 자리 탓은커녕 싫어하는 기색을 본 적이 없다. 언제 어느 곳에서 만나든지 어렵게 느껴지지 않으며 어릴 때 같이 자란 동무처럼 편안하게 만날 수 있어서 좋다.

부잣집 마님의 좀 교만한 밭에서 자라도 교만함이 없다. 젊은 새댁의 가난한 텃밭에서 자라도 마음이 움츠러드는 내색을 볼 수 없어서 좋다.

 

내가 징병신체검사를 갔을 때의 일이다. 면사무소에 11시까지 집결해서 머릿수 점검한 뒤 트럭 타고 군소재지에 도착했을 때는 1시가 넘었다. 식당 앞에 내려놓았을 때 우물가에 상추 씻어놓은 것이 있었다. 누군가 한 사람이 그곳으로 가 상추를 싸 먹었다. 그러자 모두들 그곳으로 우르르 몰려가 순식간에 상추가 동이 났다. 나도 두어 쌈 했더니 상추에 된장만 싸서 먹었는데도 허기가 가시었다. 그때 한 쌈 더 하라면서 상추를 집어 나에게 주고 웃던 얼굴이 오늘 저녁 달로 떠오른다.

마을 회관 옆 돌담 안집에 살던 손이 크다고 소문난 덕천 아주머니는 여름날 가끔 감나무 그늘 밑 평상에 도리상 펴고, 밥 따뜻이 지어 열무김치랑 찔그미(칠게) 찢어 넣고 고추장 두서너 숟가락 퍼 넣은 뒤 상추 서너 주먹 쥐 뜯어 넣어 밥 비벼서 둘러앉아 먹으라고 했었는데,

 

 

상추 값이 금값이다. 며칠 전 마트에 갔더니 야채류가 100g에 2500원이라 써 붙여져 있었다. 400g 한 근이면 만원이다. 상추 한 박스에 8만 원이라고 며칠 전 보도에서 보았는데 한 박스면 10만 원 꼴이다. 돼지고기보다 비싸다. 돼지고기는 한 근이 600g. 한 근에 삼겹살이 만 원 정도 간다. 삶아먹는 살코기는 삼사천 원이면 살 수 있다. 상추에 돼지고기를 싸 먹은 것이 아니고 돼지고기에 상추를 싸 먹는다는 말이 나올 만하다.

언제나 이맘때가 되면 상추 값이 금값이 되었지만 올해는 긴 가뭄과 갑자기 많이 온 비 때문에 다른 해보다 여름 채소 값이 더 비싸다.

상추 한 박스를 5천 원에 사서 애들과 나누어 먹었던 때가 불과 두어 달 전이었는데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농작물 값이 다 그렇다. 귀하면 비싸고 흔하면 싸서 탈이다. 다른 작물들은 년 단위로 굴곡이 있지만 상추는 계절 단위로 굴곡이 있다. 순해서 복 받아 잘 살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많은 굴곡을 겪은 여인의 인생이다.

 

 

집에 오니 보들보들한 어린 상추가 한 바구니 식탁에 놓여있었다. 가까이 사는 큰딸이 가져다 놓고 간 거다. 상추며 풋고추· 토마토· 부추· 가지· 풋호박· 오이 등 골고루 많이도 가져다 놓고 갔다.

사위가 김포 고촌에 주말농장을 한 오십 평 얻어서 이것저것 골고루 심어 가꾼다. 나도 가끔 가지만 내가 못 갈 때면 딸이 가거나 사위가 가서 이것저것 수확하여 갈 때마다 집에 푸짐하게 가져다 놓고 간다. 아무리 내 자식이라 해도 고맙다.

 

 

아내가 내일 고기 사서 싸 먹자고 한다. 내가 그냥 싸 먹으면 맛있겠다고 저녁에 먹자고 하였다. 어린 상추라 연하고 보들보들하다. 평생 상추 꼴을 못 본 것처럼 맛있는 상추쌈을 하였다. 입도 비싼 걸 잘 안다. 귀하면 더 땅긴다. 비싸면 더 맛있다.

상추가 봄에 막 나와서 얼마 동안은 매일매일 먹어도 맛이 있다. 어느 정도 먹으면 맛이 떨어지고 손이 멀어진다. 여름휴가철 이때가 되면 또 귀해지고 맛이 있다. 가을 김장거리인 무·배추와 같이 심어서 어린 상추가 나올 때가 되면 그때가 또 맛이 있다. 가을 채소가 휘늘어지면 상추보다 배추쌈이 더 맛이 있어진다.

 

 

우리 가족들은 외식을 할 때 고깃집에 가면 상추를 많이 주는 걸 좋아한다. 가족들이 다 상추를 좋아한다. 가뭄에 비처럼 상추를 조금씩 감질나게 주는 집에 가면 상추를 자주 달라고 하기가 미안하다. 말은 안 해도 뭔가 부족한 마음으로 돌아온다.

지금처럼 상추가 비쌀 땐 고깃집에 잘 가지 않는다. 비싼 상추를 더 달라고 하기가 미안해서다.

야채 셀프 집에 가거나, 우리 식성을 알고 상추를 많이 가져다주는 시골사람 같은 집에 가면 만족감이 배가된다.

 

 

주말농장에 가면 1번 아저씨는 한여름인 이때 먹을 상추를 아주 잘 가꾸어 놓는다. 곁에서 보면 여름상추가 안 된다는 말이 무색하다. 봄 상추가 거의 절정에 이를 무렵 상추씨를 파종하는 모양이다. 상추를 파종하고 비닐터널을 씌워 양옆을 걷어 올려놓고 위에 차광 망으로 그늘을 만들어주어 기르고 있었다. 지금 몇 년째 그렇게 기르는 것을 보았다. 이웃이라 사위도 자연적으로 거기서 배워 여름상추재배를 했나 보다. 두 주일 전쯤 밭에 갔을 때 상추가 조금씩 자라 있더니 지금 딱 먹기 좋을 정도로 자라서 이렇게 뜯어다 놓고 간 것이다. 긴 가뭄도 이겨내고 잠시일지라도 폭염도 이겨내고 잘 살아온 상추도 딸과 사위도

고맙다

다음생에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상추같은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좋으련만.

 

 

2017, 8 , 5

  정하선 에세이집 -견디며 사는 나무(이화문화출판사)_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