섞박지
정하선
옹기그릇 속에서 토담집 속에서
살아가며 정이 든 우리는
맞선을 본 적도 없지요
그렇다고 연애를 한 적은 더더욱 없지요
서로 다른 밭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울타리 밖을 한 번도 넘본 적도 없지요
포기포기 어머님이 물려주신 정절을 꼭꼭 채우고
밑동부터 윗동까지 아버님이 물려주신 미끈한 예절을 익히고
비로소 김장시장에서 21번 중개인의 중매로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를 보았을 뿐 이지요
우리가 서로 만나 첫날밤을 지내는 날부터
생활은 짜디짜게 우리를 옥조였지요
맵고도 아린 날들이 계속 되었지요
그래도 우리는
단 한 번도 서로를 까무러치게 미워한다고 말해본 적이 없지요
단 한 번도 서로를 까무러치게 사랑한다고 말해본 적이 없지요
아는 듯 모르는 듯 우리의 사랑은 한 겨울 내내 익어가고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금방 뜨거워졌다
기름 떨어지면 금방 식어버리는 사랑
그런 사랑 눈 감고
밤새도록 도란도란 토담집 구들장으로 등 비비며 살아가는 우리
하늘을 소복이 이고 있는 옹기그릇 속에서 맛깔스럽게 익어가는
섞박지 같은
정하선시집 (무지개 창살이 있는 감옥. 예지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