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정하선
빨간 일복을 입은 경운기 트랙터
신나게 논갈이 하는 들을 지나
숙모님댁 사립문 들어선다
눈에 익은 헛간 앞에
멜빵 삭은 지게 힘없이 서 있다
가물가물한 정신을 겨우 지탱하면서
기울어져 열려있는 외양간문으로 얼굴 내밀고
하릴없이 눈 깜박거리는 소
지금은 미국산 옥수수사료가
먹기 싫어 안 먹을 정도로 푸짐한 세상
새끼들에게 분유도 골라 먹이고
어미젖 먹이지 않는 세상
할 일 없이 먹고 놀아 살만 디룽디룽 찌는데
이렇게 마냥 먹고 놀아도
어딘가 허전하고 쓸쓸해
먼 기억을 되새김질하면
거친 여물도 모자라 못 먹던 시절
모자란 젖, 젖꼭지 헐도록 새끼들에게 물리면서도
밤늦게까지 논갈이 하던 때가
어쩜 더 좋았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그런 시절 다시 되돌아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왜 요사이 자꾸만 오목가슴을 파고드는가
마루에 앉아계신 숙모님 날 들으라는 듯
아니면 혼자 말처럼
세상이 변해가는 걸 어느 누가 막겠는가
흐르는 물은 막아도 세월은 못 막제
세월 따라 세상 따라 사는 수밖에
정하선시집(무지개 창살이 있는 감옥. 예지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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