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oem 소

정하선 2021. 9. 15. 20:46

 

 

                  정하선

 

 

 

빨간 일복을 입은 경운기 트랙터

신나게 논갈이 하는 들을 지나

숙모님댁 사립문 들어선다

눈에 익은 헛간 앞에

멜빵 삭은 지게 힘없이 서 있다

가물가물한 정신을 겨우 지탱하면서

기울어져 열려있는 외양간문으로 얼굴 내밀고

하릴없이 눈 깜박거리는 소

지금은 미국산 옥수수사료가

먹기 싫어 안 먹을 정도로 푸짐한 세상

새끼들에게 분유도 골라 먹이고

어미젖 먹이지 않는 세상

할 일 없이 먹고 놀아 살만 디룽디룽 찌는데

이렇게 마냥 먹고 놀아도

어딘가 허전하고 쓸쓸해

먼 기억을 되새김질하면

거친 여물도 모자라 못 먹던 시절

모자란 젖, 젖꼭지 헐도록 새끼들에게 물리면서도

밤늦게까지 논갈이 하던 때가

어쩜 더 좋았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그런 시절 다시 되돌아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왜 요사이 자꾸만 오목가슴을 파고드는가

마루에 앉아계신 숙모님 날 들으라는 듯

아니면 혼자 말처럼

세상이 변해가는 걸 어느 누가 막겠는가

흐르는 물은 막아도 세월은 못 막제

세월 따라 세상 따라 사는 수밖에

 

          정하선시집(무지개 창살이 있는 감옥.  예지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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