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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약속어음 , 그녀는 뻐꾸기시계 속에 살고

정하선 2020. 4. 7. 21:04

    약속어음

                       외 1편

                                   정하선

 

 

하늘바래기 논 두어 마지기 가졌을 뿐

기름지고 파실파실한 밭뙈기 하나도 없는데

하느님이 주신 약속어음은 언제 갚아주실지, 비는

토란잎이 은전을 긁어모으며

은행원보다 반질거리는 얼굴을 하고

건너편 어느 집 밭에서도

들깻잎 차곡차곡 지전을 모으며

두터운 손으로 향긋한 정을 나누고

건너편 산 아래 언덕에서는

머리 빡빡 깎아버린 호박 두엇

고의춤 끌러놓고 앉아 크게 웃으며

뱃통을 득득 긁을 수 있도록

지금의 이 넉넉함이 어찌 우리 모두의 넉넉함 이리

하느님이 주신 약속어음이 문제다

가끔가다 내리는 요즘 비는 너무 가늘다

가을은 아직 석 달이 남았습니다

 

 

 

    그녀는 뻐꾸기시계 속에 살고

 

 

 

내 갈비뼈 속

벽에 걸린 새장 속

뻐꾸기가 운다

 

 

시침은 밤을 조용히 벗고

머리를 살짝 만진다

쌀을 씻는다, 쌀뜨물 마알갛게 되도록

분침은 담배 한 대 피워 물고 아무 생각 없다

새끔새끔 초침의 숨소리만 귓속에 들려온다

 

 

뻐꾸기가 운다

분침은 보이지 않는다

호리호리한 키는 전철 속 아니면 사무실 의자

초침은 재잘재잘 아양을 떤다

시침은 가볍게 아주 가볍게 화장을 한다

시침은 오전을 아세톤으로 살짝 지우고

하오의 피로에 입술을 댄다

 

 

뻐꾸기가 운다

시침은 마음속에 침실을 만들고 골목 어귀를 바라본다

초침은 tv화면 위에 눈을 깜짝 거린다

내 가슴에 숨이 가쁘도록 뻐꾸기가 운다

뻐꾸기 울음이 물어다 준 주름살들

분침은 쳐진 어깨를 시침의 품에 가만히 기댄다

분침과 시침의 품에 가만히 손을 쥐어주며 하나 되는 초침

뻐꾸기가 운다

 

 

 정하선 시집 (재회 -,월간문학사_)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