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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촌 재개발지구에서 2

정하선 2021. 2. 2. 21:57

 

희망촌, 재개발지구에서 2

 

 

정하선

 

 

 

새로 생기는 아파트 단지

정리된 택지 옆을 흘러나가는

복개예정공사 팻말이 붙은

조그만 냇고랑 둑방길을 거닐다

버려진, 빈 드럼통 하나를 본다

커다란 몸통에 어울리지 않게

조그만 입을 벌리고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평생 입 다물고 가슴속 깊이

가두었던 말들

무슨 말인가 자꾸만 하는 것도 같지만

복막염으로 손발이 싸늘히 식어가던

아저씨의 유언처럼, 내 귀로는 해독이 어렵다

얼음에 붙잡혀, 쉽게 떠내려갈 수도 없는 듯

며칠째 신음소리

신음소리 옆에 바퀴 빠진 세발자전거

떨어진 운동화짝, 함께 널려있는 어두운 냇고랑

감추지 못한 기억들 한 편씩을 내어놓고

곧 복개가 되면

그대로 묻힐 것인지 아니면 정리되어

어디론지 트럭에 실려가 묻혀 있다가

먼 훗날 오늘의 화석이 될는지

봄이 되면 바다로 떠내려가 맑은 물 가득 담고

깊은 바다 속에 잠겨 산호숲자리 될는지

그러기보다는 고물장수의 눈에 띄어 또 다른

예쁜 그릇으로 다시 태어나 새로운 모습의 일생을 가지는 것이

더 좋을 것도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둑방길 벗어나

새롭게 단장되어가는 길로 접어든다

곧 새로운 아파트들이 들어설

 

 

정하선시집 (재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