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oem 2003 동짓달, 서울 맹인 잔치

정하선 2021. 10. 7. 20:21

 

2003 동짓달, 서울 맹인 잔치

 

 

                            정하선

 

 

 

 

나는 보지 못했다. 내 앞에 가는 사람, 그 사람이 담배꽁초 밟고 가는 것을, 아침 밥상에 자반고등어 등살을 두 아이들에게만 뜯어먹였을 손을, 그 손에 든 가방을, 오토바이가 채어 가는 것을, 나는 보지 못했다. 내 앞에 앉은 여자, 그 여자가 꼬고 앉은 짧은 치마 속에서 들려오는 전철 소리를, 사내의 발자국소리를. 아침 신문 속, 죽은 어머니와 6개월을 함께 기거했다는 어느 학생의 사진을 수백억 정치 비자금이 눈을 가려서, 찬바람이 나무껍질을 벗기고 있는 굽은 길가, 바람에 떨고 있는 목격자를 찾습니다, 란 플래카드를, 몇 일전 우연히 같은 시간 해 짧은 귀가 길에 본 뺑소니 청색차를, 그 차번호가 내 주민번호와 같았다는 것을, 나는 보지 못 했다. 플래카드 밑에 서 있는 키 작은 여자를, 그 여자가 두레박으로 퍼 올린 설음을, 깊은 분노의 샘물을, 매일 저녁 산에 걸려있던 노을과 해를, 빌딩 속 어디로 떨어졌는지 어둠만 남기고 넘어가버린 해를, 도시의 불빛 때문에, 나는 보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해야 할 인사를 컴퓨터 속에 쑤셔 박아버린 딸애의 로버트 얼굴을, 나는 보지 못했다. 도시의 불빛 때문에, 불빛에 굳어버린 내 눈동자

 

 

                        정하선시집(한 오백년 ,월간문학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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